1. 말씀묵상
우리나라는 2018년 연말을 기준으로 국민소득 3만 불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아주 잘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불 시대를 30년 전에는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우리도 이렇게 멋진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 국민 개개인은 지난 30년 전보다 훨씬 잘 살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어떤 신문사에서 국민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88올림픽이 끝난 직후에 “당신은 중산층입니까?”라는 질문에 우리 국민 70%는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오늘 “당신은 중산층입니까?”라는 질문에 48%정도만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소득계층상 하위계층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30년 전보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훨씬 더 잘살게 되었습니다. 좋은 차도 타고 외식도 더 많이 하고 좋은 집에 살고 누리는 것도 더 많은데 사람들은 30년 전보다 나아진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절대적 빈곤은 없어졌는데 상대적 빈곤감과 위화감이 지배하는 이상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으로 미루어보면 사람들이 느끼는 부의 개념은 절대적인 것이라기보다 상대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상대적인 박탈감을 많이 호소하고 있고 느끼고 있습니다. 나보다 더 잘사는 사람을 바라보고 그들이 소비하는 것보다 나는 더 적게 소비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빈곤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회가 아무리 발전하고 나라가 잘 산다 하더라도 가난은 이 땅에서는 사라지지 않을 심각한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라가 잘 산다 하더라도 빈곤한 계층은 사라지지 않고 상대적인 박탈감은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이 가지고 있는 문제입니다.
오늘 읽은 잠언에서 지혜자는 가난에 대해서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가난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특징을 먼저 보여줍니다. 4절 말씀입니다.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 가난은 인간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물질이 많으면 주변에 모이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물질이 사라지면 친구들도 자연스럽게 끊어집니다. 일반적으로 물질과 가난이 주는 특징이고 법칙입니다.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7절입니다. “가난한 자는 그의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하지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 형제들과 친구들까지 가난한 자를 주변에 두기를 싫어합니다. 왜 그럴까요? 부담되기 때문입니다. 손을 벌리려 하고 눈빛이 자신에게 부담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물질을 대하는 방법이고 가난을 대하는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이려고 합니다. 소득계층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입니다. 부자는 부자들끼리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끼리 모입니다. 마음 편하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평수에 사는 사람들끼리, 비슷한 브랜드의 옷을 입는 사람들끼리, 비슷한 차를 타는 사람들끼리 모이려고 합니다. 어른들 뿐만 아니라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않은 아이들까지도 자기들만의 왕국을 구축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의 사람들도 이렇게 사는 것이 옳으냐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인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도 과연 이렇게 사는 것이 옳으냐 하는 질문 앞에 감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7절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여기서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하난’이라는 히브리어입니다. ‘하난’은 심정적으로 불쌍히 여기고 “참 안됐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베풀어주다. 손이 일을 하다.’라는 뜻입니다. 가난한 자를 위해서 선행을 베풀고 긍휼히 여기고 나의 손이 그들을 직접 도와주는 것이 불쌍히 여기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룻기에 등장하는 보아스를 잘 알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대단한 부자였습니다. 부자라고 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깝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부를 이룬 시간을 생각하면 베푸는 것이 아까울 것입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불쌍한 룻과 나오미를 보았을 때 기꺼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부를 나누어 주는 넉넉한 사람이었습니다.
17절 말씀에 보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돈을 꾸는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받고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갚아주십니다.
원래 고아와 과부로 대표되는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이 직접 챙기고 돌보아 주십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우리가 도맡아서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반드시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았던 보아스에게 은혜를 갚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꾸고 나서 가만히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아스를 만인 앞에 존귀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름이 기록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다윗의 조상이 되게 해주셨고 예수님의 조상이 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 옛날 초대교회 시절에도 가난한 자들과 부자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기꺼이 자기의 재물을 내놓았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있는 자나 없는 자나 서로 유무상통하는 공동체였습니다. 끼리끼리 모이는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있는 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꺼이 은혜를 베풀어 주는 믿음의 공동체였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이렇게 은혜 넘치는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 꾸어주는 지혜로운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꾸어주면 하나님은 꾼대로 갚지 않으시고 열배, 백배, 그 이상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가난한 자들, 고통 받는 자들이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으로 갚아주시고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또한 오늘 말씀은 가난한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교훈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 가난하지만 성실을 잃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아무리 일해도 가난을 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게으르게 됩니다. 이런 인생을 살지 말라고 교훈하십니다. 가난하지만 게으르지 말고 성실하게 살아서 가난을 면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지금은 비록 물질적으로 가난하다 할지라도 게으른 사람이 되어버리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실한 자와 함께 하시고 진실하고 열심히 행하는 자와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3절입니다.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가난한 자가 자신의 가난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고 원망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가난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하나님이 구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성실하게 자기 길을 개척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주변에 돕는 자를 보내주실 것입니다. 은혜를 베풀 자들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감사하고 진실과 성실로 살아가신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 통해서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가 오늘도 진실과 성실함으로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실천다짐
1) 주변 이웃을 돌아보고 그들을 구제하여 하나님께 꾸어주는 삶을 살겠습니다.
2) 가난과 어려움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성실하게 살겠습니다.
3. 한줄기도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의 눈으로 이웃을 보게 하시며 어려운 삶이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성실하게 살도록 힘과 능력을 더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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