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말씀묵상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시는 책망과 저주, 심판은 굉장히 두렵고 무서운 말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심판의 말씀은 이중적입니다. 이중적이라 함은 말씀을 듣고 돌이켜 회개하면 살아날 것이나 돌이키지 않으면 심판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돌이키면 살아나고 돌이키지 않으면 심판 받는다는 것이 심판을 예고하는 선지서의 핵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도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화 있을진저’라는 말씀을 여섯 번이나 거듭하시면서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도 역시 이중적입니다. 돌이키면 살아날 것이나 돌이키지 않으면 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두려운 말씀이지만 복음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여섯 번의 ‘화 있을진저’를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42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십니다. 이들은 외적인 종교 행위는 철두철미하게 잘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십일조 생활로 대표되는 종교생활은 성실하게 감당했습니다. 하지만 뿌리가 없어 말라버렸습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인 정의와 사랑을 상실했습니다. 행위만 남았습니다. 껍데기만 있는 이들의 신앙을 주님은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즉 뿌리를 살려 내라는 말씀입니다. 정의와 사랑을 버리지 말고 지금 너희들이 하고 있는 선한 행위도 멈추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을 비난합니다. 종교성에만 함몰된 사람들이라고 갖은 비난을 쏟아냅니다. 그런데 우리 행위가 어떻습니까? 마음만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 해놓고 행위로 표현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십일조 정신만 가지고 살아서는 안 되고 십일조는 행위로 드려야 합니다. 봉사하고 싶다는 마음만 가지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봉사는 행위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이제 우리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붙잡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43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주님이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두 번째 이유는 높은 자리에 서기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회당에서 상석에 앉기 좋아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에서는 인사 받는 것을 당연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고개 숙이는 법이 없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인사하지 않으면 불쾌하고 기분 나쁘지만 자신은 먼저 인사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행동은 주님이 주신 말씀과 맞지 않습니다. 주님은 섬기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곳까지 내려갔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죄인과 창기, 세리들의 친구가 되셨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사람들은 가까이 가지 않으려 했던 나병환자, 중풍병자, 각색 병자들에게 손을 대어 고쳐주셨습니다. 죽은 지 오래된 시신에 손을 대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섬기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중직을 가진 자들, 사회에서 어느 정도 성공하신 분들 모두가 섬김의 정신을 놓치면 곤란합니다. 주님께서 책망하실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섬김을 받으려 하는 자들아” 호통을 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정신을 가지고 섬김을 실천하는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계속해서 44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민수기 19장 16절을 보면 무덤을 만진 사람, 무덤을 접한 사람은 부정한 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부정한 사람이 되면 정결하게 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얼마간 격리되어 있다가 기간이 끝나면 예배 후 다시 공동체로 복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평토장한 무덤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평토장한 무덤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무덤 위에 서게 됩니다. 그러면 그 위에 섰던 사람은 그만 부정한 자가 되어 격리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그만큼 악한 영향력을 주변에 끼친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끼치는 악한 영향력은 사람들을 오염시키고 오염된 사람들은 영적으로 회복되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율법적인 행위가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이 아닌 악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입니까? 악한 영향력입니까?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타락하고 게을러지고 입이 거칠어지면 우리는 악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입니다. 가정의 가장인 나로 인해서 자녀들이 잘못된 성품을 배운다면 우리는 악한 영향력의 화신이 됩니다. 지체 없이 돌이켜야 합니다.
46절입니다.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주님은 이제 율법 교사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예수님 시절 십계명에서 파생되어 만들어진 율법이 613가지였습니다. 그 중에는 하라고 명한 율법이 248가지이고 하지 말라고 한 금령이 365가지였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자기들도 지키지 않으면서 율법을 사람을 억압하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의 두 돌 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정신을 구현하지는 못할망정 613가지나 되는 율법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숨 막히게 하고 죽이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교회는 상호성의 원리 위에 존재하는 공동체입니다. 목사와 중직들이 먼저 말씀을 실천해야 처음 믿는 분들에게 부탁할 수 있습니다. 목사도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서 성도들에게 지키라고 설교하는 것은 이율배반입니다. 중직자들도 봉사하지 않으면서 성도들을 정죄하는 것은 이율배반입니다. 타인에게 짐을 지우면서 우리는 손가락 하나도 까닥하지 않는다면 예수님 당시 율법교사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습니까?
계속해서 47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구약시절부터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가 존재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참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괴롭혔습니다.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 학자들은 결국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들이었는데 메시아 이신 예수님을 죽이는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율법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행하라고 남을 정죄하고 강요하면서 오히려 그들의 영혼을 죽이는 자가 아닌지 돌이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52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율법학자들은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식의 열쇠를 가졌습니다. 그 열쇠를 가지고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말씀 앞에 제대로 서서 믿음이 어린 자들과 글을 모르는 자들을 인도하는 자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오히려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었습니다. 그들의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자기들에게 유리한 말씀만 뽑아내었습니다. 백성들을 혹세무민하고 괴롭혔습니다.
오늘 살펴본 여섯 가지 ‘화 있을진저’의 말씀을 통해 나는 어디에 해당되는지 정직하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은 이중적입니다. 돌이켜 회개하면 하나님의 은총이 있을 것이고 끝까지 악한 일을 계속하면 심판 받을 것입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2. 실천다짐
1) 주님께 책망받는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다.
2) 악한 자들을 타산지석 삼아 하나님의 사랑을 받도록 결단하겠습니다.
3. 한줄기도
사랑의 하나님, 언제나 주님 사랑을 의지하고 악한 길을 떠나 진리의 길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성경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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