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말씀묵상
우리가 좋아하는 단팥빵은 밀가루 반죽과 달콤한 팥 앙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붕어빵도 마찬가지입니다. 밀가루 반죽만으로 단팥빵이나 붕어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팥 앙금만으로 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 빵이라고 말합니다. 김밥도 마찬가지입니다. 김, 그리고 밥, 그 안에 들어가는 각종 재료를 김밥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재료가 흩어져 있을 때 김밥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조화를 근본으로 합니다. 모든 것이 완전한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그 물건, 그 음식으로 불러 줍니다.
사물이 조화를 이루어야 이름을 가진다면 사람은 언제 진정한 사람이라고 부를까요? 영혼만 있어도 사람이라 할 수 없고 육체만 있어도 사람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형체를 만드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때 이후로 사람은 육체와 영혼이 조화를 이루어 공존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존재를 우리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사람의 창조이며 존재 양식이라면 죽음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입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면 그때부터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주님의 부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주님의 부활은 영의 부활입니까? 육체의 부활입니까? 아니면 영혼과 육체가 함께 부활한 것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은 영혼과 육체가 동시에 부활한 완전한 부활임을 알려줍니다. 본문 36절을 보시겠습니다.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부활의 아침까지 두려워서 모인 곳에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밤이 되면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갈까 봐 불도 켜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처럼 체포되어 십자가에 달려 죽을까봐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하신 첫 번째 말씀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강은 헬라어로 ‘에이레네’입니다. ‘에이레네’는 구약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샬롬’입니다. ‘에이레네’와 ‘샬롬’은 일상적인 평화가 아닙니다. 거짓된 평화, 위선된 평화, 가짜 평화가 아닙니다. 샬롬과 에이레네가 말하는 평화는 완전한 평화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누리는 평강의 상태가 완전한 상태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모진 채찍을 다 견뎌 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십자가에서 여섯 시간 동안 손과 발에 못이 들어가고 허리에 창이 들어왔습니다. 피와 물을 다 쏟았습니다. 온 몸이 찢겨 나갔습니다.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죽음이 예수님을 삼킨 것 같고 사망이 주님을 이긴 것 같아 보였습니다. 거기까지는 평화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두려움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삼 일 만에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죄의 사슬을 끊고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모진 고난과 십자가와 죽음의 고통을 통과하시고 부활하셨기에 완전한 평화인 샬롬과 에이레네를 말씀할 자격이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가진 샬롬의 평화를 제자들에게도 나누어 주기 위해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체를 입은 사람은 평강을 누릴 수 없으니 내 안에 거하면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너희는 평강 가운데 거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죽음의 권세를 이길 수 없습니다. 사망 권세를 깨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죽음의 권세를 이길 수 있습니까? 예수님 이전 어떤 인간도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죽음과 죄 앞에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진정한 평강을 줄 수 없습니다. 나라와 나라가 전쟁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위장된 평화입니다. 서로가 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핵을 터뜨리면 상대도 죽고 나도 죽기 때문에 그들은 긴장 가운데 위선된 평화, 가짜 평화로 위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평화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를 주지 못하지만 사망 권세 이기신 주님 안에 있으면 완전한 샬롬의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나의 평강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평강을 말씀하셨지만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제자들의 태도가 이상합니다. 37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못 박히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새 무덤에 뉘인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 앞에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시는 주님을 영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육체의 부활은 일어날 수 없고 예수님의 영혼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만져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살도 있고 뼈도 있지 않느냐? 그러므로 주님은 육체와 영으로 부활한 완전한 부활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증거로 너희에게 먹을 것이 있으면 가져오라고 말씀하십니다. 41절에서 43절입니다.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만약 주님이 영으로만 부활하셨다면 토막 난 생선을 드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영과 육의 완전한 부활이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체와 영혼의 완전한 부활을 하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영과 육을 함께 소중히 여겨야 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어떤 사람들은 영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기도하고 말씀 읽고 예배드리는 것은 좋아 하는데 몸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은 하찮게 여깁니다. 몸의 봉사를 하지 않습니다. 영혼에 기쁨과 만족이 있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육체와 영혼의 완전한 부활인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은 육체와 영혼이 어우러져야 합니다. 반대의 사람도 있습니다. 육체는 땀을 흘립니다. 봉사합니다. 손과 발이 수고합니다. 이웃에게 수고한 것을 건넵니다.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돌보지 않습니다. 말씀도 가까이 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배를 하찮게 여깁니다. 이것도 잘못된 믿음생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영혼과 육체의 완전한 부활인 것처럼 우리의 믿음 생활도 육체와 영혼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주님은 누가복음의 결론으로 너희들은 이 모든 일에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48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지금까지 너희들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나가서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데오빌로 각하에게 누가복음을 기록해서 보내줍니다. 사도행전도 그가 바울을 따라다니며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것을 기록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신앙생활하면서 받은 은혜를 혼자만 가지고 있어서는 곤란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입니다. 증인의 정체성은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달은 바를 전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것을 증거하는 믿음의 증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루도 완전한 부활의 주님을 따라가는 증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실천다짐
1) 완전한 부활을 이루신 주님을 따라 육체와 영혼의 조화를 이루겠습니다.
2) 주님을 경험한 것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겠습니다.
3. 한줄기도
사랑의 하나님, 언제나 주님을 따르고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 부활의 주님과 함께 동행하게 하옵소서.
성경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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