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말씀묵상
인지능력이 채 발달하지 않은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해보면 아이들의 독특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머리만 숨기고 숨었다고 말합니다. 커튼에 머리만 넣고, 의자 밑에 머리를 집어넣고 얼른 찾아보라고 합니다. 어른들은 아이의 놀이에 장단을 맞추어 줍니다. 아이들이니까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런데 만약 어른이 그렇게 행동한다고 하면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지능력 발달에 장애가 생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이런 행동을 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 누구도 숨길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함부로 행동합니다. 그러면서 죄를 은폐했다고 착각합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기다려주시고 모른 체하실 뿐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요나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영적인 인지능력에 장애가 있는 요나,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어떤 것도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사명을 망각한 자가 어떤 인생을 걷게 되는지 살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기억하고 사명대로 행동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나는 기원전 8세기 북이스라엘에서 예언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기원전 8세기 북이스라엘은 부강하고 부유했습니다. 그들은 여로보암 2세 치하에서 풍요로운 세월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기원전 8세기 그들에게 선지자들을 세 분이나 보내셨습니다. 호세아, 아모스, 요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시기에 선지자 세 분이나 보내셨을까요? 그들에게 물질이 풍요했기 때문에 반대로 영적으로는 타락했습니다. 죄를 짓는 것을 겁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그들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호세아,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에서 예언한 선지자였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해외에 나가서 선교한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부르시는 첫 장면입니다.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2절 말씀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동사가 중요합니다. 일어나라, 가라, 외치라. 세 개의 동사가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가라고 하시는 곳은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였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앗시리아는 북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상황을 고려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정상적인 선지자는 인간적인 관계에 매이지 않습니다. 호세아를 보십시오. 호세아가 고멜과 결혼하지 않습니까? 방탕한 여인과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명령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입니다. 예레미야는 자기를 받아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서 예언합니다. 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싫어할 것을 뻔히 알고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매 맞고 갇히고 생명의 위협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예언하는 것입니다. 사사로운 감정에 매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생각하는 것이 선지자입니다.
오늘 우리도 크건 작건 사명을 받았습니다. 먼저 믿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절대적인 가치를 가집니다.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하는 가치를 가집니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돌아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명령을 얼마나 많이 거부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핑계 대는 자를 반드시 그 자리에 데리고 가십니다.
요나는 사명을 거부하고 자기 길로 갑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가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났습니다. 3절 한 절에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라는 말씀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미련한 인생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후에 하나님을 피하려고 한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손바닥 보듯이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죄 짓고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고 착각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기 위해 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고 배에 오른 자가 자기 길을 합리화하기에 좋은 상황이 닥칩니다.
3절 말씀에 ‘마침’이라는 단어를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시간 맞춰 온 것입니다. 사탄이 요나에게 준 착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피하니 이렇게 시간 맞춰 배도 오지 않느냐? 사탄이 요나의 행동에 합리화를 줍니다. 사탄이 환경을 만들어줍니다. 마침 배가 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사탄이 보낸 배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피하여 다른 일을 하면 생각보다 일이 잘 됩니다. 돈도 인간관계도 잘 풀립니다. 마침 좋은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때 생각해야 합니다. 사탄이 일을 만들어주는구나.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려는 사탄은 하나님을 피하는 우리의 앞길을 열어줍니다.
다시 3절 말씀을 보면 ‘내려가다’는 단어가 나옵니다. 히브리어 ‘야라드’입니다. 요나는 인생의 내리막길을 걷는 것입니다. 사명을 피하는 자는 ‘야라드’, 즉 내려가는 인생을 걷는 것입니다. ‘야라드’가 두 번 나옵니다. ‘배에 올랐더라’, 우리말에는 올랐다고 표현하지만 히브리어에는 ‘내려가다’, ‘야라드’입니다. 그런데 3절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5절 말씀도 보십시오.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그는 배 밑바닥 까지 내려갑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는 자가 배를 탔지만 그의 영혼은 내려가고, 내려가고 또 내려갔습니다. 인생의 내리막길로 치닫는 것입니다. 자기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실제로는 인생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명을 피하는 것은 이렇게 영적인 죽음과 절망으로 내려갑니다. 밑바닥으로 내려가면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4절과 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사명을 피하는 자는 영적인 감각이 둔해집니다. 폭풍 때문에 배가 흔들리고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노하셨습니다. 요나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믿지 않는 선장을 비롯해서 선원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습니다. 자기가 섬기는 신들에게 구합니다. 물건을 바다로 던집니다. 하지만 요나는 무심했습니다. 절대적인 영적 평안 가운데 잠든 것이 아니라 영적인 무지로 잠 들었습니다. 주변에 일어나는 상황에 둔감한 요나입니다. 선지자는 누구보다 환경에 예민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환경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도망한 요나는 영적인 무감각 상태에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미련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자신이 섬기는 신들의 이름을 부르는데 요나는 깊이 잠들어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요나가 제비 뽑혔습니다. 요나는 이 문제가 자신으로 인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습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일견 멋진 사람으로 보입니다. 책임지려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만용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하나님 나 때문에 이 풍랑을 일으키셨군요. 잘못했습니다. 제가 엎드리겠습니다. 하나님, 풍랑을 잠재워주십시오. 여기 있는 선원들은 죄가 없습니다.” 그는 엎드려 기도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사명을 떠난 선지자는 유연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사명을 떠난 자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 고집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요나의 모습을 통해서 누가 보이십니까? 우리 자신이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기억하신다면 사명대로 행해야 됩니다. 사람을 섬기는 사명, 베푸는 사명, 돌보는 사명 등,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로 사명을 부여받았다면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피할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도 하나님은 찾아내실 것이고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집스러운 요나, 영적인 무감각에 빠진 요나를 되돌려 놓습니다. 물고기를 준비하셨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하나님은 요나의 영적 무지와 고집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밤낮 삼일을 있게 하셨습니다. 그를 힘 빼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릎 꿇게 하시는 것입니다. 캄캄한 물고기 뱃속이 우리 앞에 다가오기 전에 무릎 꿇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하나님의 자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실천다짐
1) 주신 사명을 잘 기억하고 그대로 행하겠습니다.
2) 영적 무감각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겠습니다.
3. 한줄기도
사랑의 하나님, 언제나 진리 안에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사명을 잘 감당하기 원하오니 결단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옵소서.
성경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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