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말씀묵상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에서 했던 말을 지키지 않고 자주 번복하는 사람은 신뢰를 얻기가 어렵습니다. 식언을 했다는 전력 때문에 그렇습니다. 식언은 ‘말을 먹는다’, 즉 ‘말을 삼킨다’는 의미입니다. 한번 뱉은 말은 상황이 바뀌거나 불리하더라도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을 삼켜버리고 지키지 않으면 공동체에 신뢰감을 주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길고 긴 인생길을 살아가다 보면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것이 선이 아닐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지키지 않는 것이 가족이나 공동체에 유익이 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하나님은 하신 말씀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행하는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때로는 당신이 하신 말씀도 얼마든지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성경말씀 곳곳에 보면 하나님이 뜻하신 바를 돌이켰다는 것이 기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도 역시 같은 사건이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일에 당신이 하신 말씀을 바꾸실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뜻을 돌이킬 때는 더 깊은 뜻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다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요나는 삼일동안 밤낮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구원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고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물고기에게 명하셔서 그를 육지에 토하게 하셨습니다. 1절과 2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사명을 주신 1장 말씀에 보면 “일어나, 가서, 외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두 번째 요나에게 사명을 주실 때도 똑같이 말씀합니다. “일어나, 가서, 선포하라” “쿰, 얄라크, 카라”입니다. 원어에 보면 똑같은 단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이렇게 행하기를 바라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실 때 사명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은 변치 않습니다. 사명을 받는 사람이 바뀔 뿐입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가버렸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도 행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른 길로 가버리는 악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생을 하나님은 다시 불러서 재차 사명을 주십니다. 일어나 가서 선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사명을 받은 요나는 달라졌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니느웨 성은 사람이 열심히 돌아도 사흘 동안 걸어야 될 만큼 큰 성읍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전심을 다해서 복음을 전하려 했다면 시간이 오래 걸렸을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고 집집마다 들어가서 사십일이 지나면 이 성에 큰 환난이 닥칠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요나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삼 일 동안 열심히 다녀도 돌지 못할 큰 성읍 니느웨를 설렁 설렁 하루 동안 대충 다녔습니다. 그리고 요나는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본뜻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본뜻은 이 성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멸망을 예고해서 그들을 회복시키고 다시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선지자는 이렇게 전해야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같이 살면 사십 일이 지난 후에 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하면 하나님은 용서해주십니다.” 이렇게 전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대한 마음이 온전치 않았습니다. 그들이 빨리 망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사명을 받아서 그 자리에 섰지만 반쪽짜리 선지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5절과 6절을 보십시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백성들부터 왕까지 모두 요나의 말을 듣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서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누가 행한 것입니까? 요나가 능력이 있어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요나는 반쪽짜리 선지자로 심판을 예고했으며 하루 동안 대충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반쪽짜리 선지자와도 동역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니느웨 성을 심판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명을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모자라고 죄가 많은 요나를 통해서도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주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역하는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연약하고 죄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마른 막대기보다 못한 나를 통해서 일하시며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잘나서 이룬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고백하며 기도할 때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찬양입니다. “하나님, 저는 한 일이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교만하고 반쪽짜리 마음으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놀랍고 크신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찬양하고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한 니느웨 백성을 용서해 주시고 그들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이 뜻을 돌이켰습니다. 하나님은 한번 정하신 것을 돌이키지 않는 분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뜻을 돌이켜서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생명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들의 생명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심판을 철회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을 비난하고 조롱할 것입니다. 거짓말 한다고 비웃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크고 높은 뜻은 생명사랑입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은 어떤 비난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사랑의 수혜자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생명을 부지하고 이 자리에 살아있을 수 있을까요?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진작 죽어야 할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니느웨 백성들을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 생명을 사랑하시고 뜻을 돌이키셨기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는 생명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시고 깨닫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 대해서도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죽어야 할 요나가 다시 밖으로 나와서 살아있는 생명이 되어 사명을 감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비난할 수도 비난할 이유도 없습니다. 생명을 존중하시는 하나님을 본받아 우리도 생명사랑의 가치를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본받고 생명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자녀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실천다짐
1)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 생명을 존중하고 살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3. 한줄기도
사랑의 하나님, 언제나 하나님 안에서 생명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자녀가 되도록 마음과 생각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성경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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